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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상사태를 알리는 식물들의 공통어 <그림1 미역취 잎벌레> 식물과 이야기를 나누면 식물이 더 잘 자란다는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지요. 이완주 선생님의 <식물은 지금도 듣고 있다>는 책은 그런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또, 한국 속담에 “작물은 주인의 발자국 소리를 듣고 자란다”는 것도 그와 같은 맥락일 겁니다. 상식적으로 따져도, 최소한 논밭을 관리하는 농부가 그만큼 자주 가서 작물을 들여다본다는 뜻일 테니까요. 그런데, 식물들이 수동적으로 소리만 듣고 있는 게 아니라 서로 “대화”를 나눌 수도 있다는 연구들이 하나둘 발표되고 있어 이목을 끕니다. 코넬 대학의 생태학자이자 진화생물학자인 안드레 케슬러André Kessler 교수가 그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그는 자신의 연구진과 함께 지난 12년 동안 양미역취(Solidago altissima)라는 식물들 사이의 의사소통에 대해 연구했습니다. 지난 9월 23일 발표된 그들의 연구결과에 의하면, 식물들이 서로 대화하는 방법이 있다고 합니다. 도대체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사람처럼 언어를 소리를 내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바로 휘발성 유기화합물의 형태로 정보를 전달한다고 합니다. 이들이 실험한 내용을 이렇습니다. 양미역취라는 식물에 그들을 먹고 사는 미역취 잎벌레(goldenrod leaf beetle)라는 초식동물을 투입한 다음 어떤 반응이 나타나는지 관찰합니다. 미역취라는 식물은 데쳐서 먹으면 미역 냄새가 난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지요. 그만큼 독특한 냄새가 나는 걸로 유명한데, 각각의 식물체는 서로의 유전자형에 따라 조금씩 다른 냄새를 풍긴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미역취라는 식물이 잎벌레에게 공격을 당하자 서로 비슷한 냄새를 풍기는 휘발성 유기화합물을 내뿜었다고 합니다. 그러면 이 냄새를 느낀 다른 양미역취들이 거리에 상관없이 자신들에게 해를 입히는 곤충이 다가옴을 알고 미리 대비했다고 합니다. 이런 현상을 통해 연구진은 양미역취가 위기 상황을 공유하기 위해서 똑같은 언어 또는 경고 신호를 내보낸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죠.   식물이 그런 초식동물을 방어하는 방법은 몇 가지 알려져 있습니다. 바로 독특한 향이나 화학물질을 내뿜어 그들의 천적을 불러오거나, 아니면 직접적으로 해충이 싫어하는 향이나 화학물질을 내뿜거나, 해충이 싫어하는 맛이 나는 물질을 체내에 가득 합성하는 등입니다. 이러한 방식을 활용한 농법은 다양합니다. 흔히 고추밭 사이에 들깨나 대파 같은 향기가 같은 식물을 심어 해충을 막는다든지, 콩밭 둘레를 만수국이나 금잔화, 코스모스 등을 잔뜩 심어 노린재 피해를 예방하고자 한다든지 하는 방법은 잘 알려져 있는 사례입니다. 이전 기고에서 여러 번 소개한 해충의 천적을 유인하기 위한 여러해살이 식물 등의 밭도 그 일환이지요.   논밭에는 작물만 심는다는 생각을 바꾸어 여러 식물이 어우러지는 공간으로 꾸미면 여러 가지 농자재에 대한 의존을 줄이고 많은 혜택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그를 통해 우리가 잃을 것은 작물을 심을 약간의 공간이요, 얻을 것은 아름다운 경관은 물론 건강한 생태계를 통한 여러 이득이지요.   <그림2 농화학물질을 사용하지 않고 토마토를 보호하기 위한 방책으로 활용하는 유인작물. 해바라기나 수수에서 내뿜는 휘발성 유기화합물이나 식물체 또는 꽃의 색깔이 해충과 그 천적을 유인해 토마토의 피해를 줄이는 전략이다>   <그림3 그림2의 원리를 적용한 밭의 모습.>         안드레 케슬러 교수의 연구진이 발표한 논문: https://www.cell.com/current-biology/pdfExtended/S0960-9822(19)31027-9     **[농사잡록]은 김석기 선생님의 연재코너입니다. 강희맹 선생의 [금양잡록]에서 따온 이름입니다. '농사와 관련된 잡다한 기록'이란 뜻입니다.**

2019년 10월 19일 | 김석기

“지금 국가의 일에 밤낮으로 마음을 다하는 자가 적으니 진실로 탄식할 일이로다.” 농업이 근간인 조선에서 수리행정은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중앙 단위에서 초기부터 호조에서 담당하다가 성종 12년(1481년)에 전담기관인 제언사를 설치하였다. 임란 이후 국가기강이 문란해지며 유명무실해진 제언사를 현종 3년(1662년)에 다시 설치하면서 수리행정의 시행규칙 격인 「진휼청 제언사목」을 제정하였으며 정조 2년(1778년)에는 「제언절목」을 반포하였다. 「진휼청 제언사목」에 “제언사를 다시 설치하고 도제조는 삼공으로, 제조는 호조판서와 진휼청당상이 겸찰(兼察)”(『비변사등록』 22책, 현종 3년, 1662년 1월 26일)한다고 했다. 그러니까 제언사의 직급을 지금의 국무총리로 최고로 높였다. 지방 단위에서는 지방수령이 수리사업을 실제로 집행하였다. ‘수령 칠사’라 하여 지방관이 힘쓸 7 가지 일 중 하나가 ‘농상 장려’였다. 지방관의 소임을 충실히 다하도록 제언 수축을 포함해 다양한 정량 지표를 고과에 반영하였다. 태종 때 정한 수령의 인사고과 내용을 보면 당시에 무엇을 중요시했는가를 알 수 있다. “농상(農桑)을 권과(勸課)하여 경내에 제언(堤堰)을 수축한 곳이 몇 곳이며, 도임 후 백성에게 뽕나무 심기를 권고하여 매 1호에 몇 주(株)씩 심었으며, 관(官)에서 심은 뽕나무를 나누어 주어서 심은 것은 매 1호에 몇 주씩인가? 백성에게 수차(水車)를 만들도록 권한 것은 한 마을에 몇 개씩이며, 관에서 만들어 나누어 준 것은 한 마을에 몇 개씩인가? 권경(勸耕)한 것은 몇이며, 온 집안이 병을 앓고 있는 자는 이웃[隣理]으로 하여금 경작해 주게 하고, 그가 회복되기를 기다려 값을 갚아주게 한 것이 몇인가?”(『태종실록』 태종 6년, 1406년 12월 20일) 「제언절목」은 「진휼청 제언사목」에 비해 보다 구체적으로 규칙을 정한다. 제언을 파내어 소통시킬 때 나온 진흙을 제언 안에다 모아 쌓지 말고 제방 위에 쌓으라, 제언에 수통(水桶)이 없었기 때문에 물을 대기가 불편하고 흙을 쌓아놓은 곳이 많이 터졌으니 앞으로는 반드시 수통을 설치하라, 역사에 드는 군정은 호적의 차례에 따라 부역하게 하라, 전에 쌓은 제언의 높이는 얼마인데 금년 새로 쌓은 것의 높이는 몇 척이라고 구별하여 본사에 올려 보내라 등등이다. 「제언절목」의 내용과 같이 풍석 선생의 제안도 비슷하다. “진실로 둑을 굳게 하고 수문을 견고하게 한 뒤 수문을 때에 맞추어 열고 닫으며 몰래 도랑 파는 것을 금지하여 물이 새나가지 않게 한다면, 호수는 힘들이지 않고 복구될 수 있으니, 백성들이 비록 제멋대로 경작하여 농지를 만들고자 하여도 할 수가 없을 것이다. … 호수를 준설할 때는 이치상 반드시 흙을 둑 위에 놓아야 하고, 둑을 쌓을 때는 이치상 반드시 흙을 호수에서 취해야”(『본리지』 1-274) 한다는 것이다. 제언사목이나 제언절목에서 규정으로 자세히 강조한다는 것은 시행되지 않는다는 현실을 반영한다. 조선이 막 새로 시작한 때인 태조 4년에 정분(鄭芬)은 제언 축조의 중요성을 진언하면서 물구멍 설치를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수구(水口)에는 돌로 도랑을 만들어 그 위를 쌓게 하고, 뚝과 같도록 도랑 안쪽에는 나무통을 세우고 나무통 안쪽에는 셋이나 다섯 구멍을 만들어서 물의 높고 낮은 데를 따라서 통하거나 막히게 하며, 도랑 바깥으로는 나무통을 두되 두 끝을 비워 두고, 그 밑으로는 좌우로 물을 내려서 끌어가도록 하고, 따로 제언의 한 쪽에 몇 자나 낮게 쌓되 수통의 웃구멍보다 약간 높게 돌을 깔아서 장마에 물이 뚝을 넘치는 것을 방비하소서.”(『태조실록』 태조 4년, 1395년 7월 30일) 태종 때 우희열(禹希烈)이 제언의 일로 상서한다. “‘어느 수령은 어느 해 어느 철에 옛 터에 축조를 더 한 것이 몇 군데이고, 새로운 터에 축조한 것이 몇 군데이고, 물을 저장한 것이 몇 척이고, 관개한 땅이 몇 결이라’는 것을 일일이 갖추어 써서 시행하여 감사에게 보고하고, 감사가 척간(擲奸)하여서 출척(黜陟)에 빙고하게 하소서.”(『태종실록』 태종 18년, 1418년 1월 13일) 지방관의 제언 수축 내용을 정량적으로 기록한 것을 인사고과에 반영하기를 간청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문제는 비슷하다. 정분과 우희열은 최고의 수리전문가이다. 사업의 중요성과 방식을 몰라서가 아니라 시행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정조 2년에 반포된 「제언절목」에서 제언을 논으로 바꾸어 쓰는 ‘모경(冒耕)’이라는 고질적인 병폐를 경계한다. 그로부터 20년 후 농사를 권장하고 농서를 구하는 구언 전지를 내렸던 개혁 군주 정조도 어쩔 수 없었다. “제언(堤堰)에 관한 정사를 오랫동안 버려두어 제언에다 불법적으로 경작하는 일이 잇따르고 있다. 호남 지방의 벽골제(碧骨堤)와 호서 지방의 합덕지(合德池), 영남 지방의 공검지(恭儉池), 관북 지방의 칠리(七里), 관동 지방의 순지(蓴池), 해서 지방의 남지(南池), 관서 지방의 황지(潢池)와 같은 제언은 나라 안에서 큰 제언이라고 칭해지는데 터놓을 곳을 터놓지 않고 막을 때 막지 않아서 장마가 지나간 뒤 즉시 말라붙어 해마다 흉년이 들고 있다.”(『정조실록』 정조 22년, 1798년 11월 30일) 어떻게 이 지경까지 이르렀는가. 연산군이 출가를 앞둔 휘순 공주에게 합덕의 제언을 주고자하였는데 좌의정 성준(成俊)이 “합덕의 제언은 혜택을 입는 백성이 많으니 이를 빼앗아 줄 수는 없습니다”하고 예조 판서 이세좌(李世佐)는 “제언을 폐지하여 공주에게 주는 것은 사체에 옳지 못합니다”하니 뜻을 접었다.(『연산군일기』 연산 8년, 1502년 5월 2일) 왕부터 잘못을 하니 관료들도 협작꾼이 되었다. “승천부(昇天府)의 제언은 상주민이 물을 저장한 곳인데, 윤백원(尹百源)이 그 땅이 넓고 기름져서 전답으로 하기에 알맞다 하여 작고한 처모(妻母) 효혜 공주(孝惠公主)의 이름을 도용해서 그 토지를 떼어 받아 이양(李樑) 등과 함께 차지했고, 이언충(李彦忠)은 그때 감사로서 백성을 징발하여 메우는 일을 주관하였는데 몰래 그들과 더불어 이익을 분배하였으며, 이양은 이조 판서로 있으면서 생원 박여주(朴汝柱)가 감독한 공이 있다 하여 곧 의금부 도사를 제수하고 정청(政廳)에서 공공연히 ‘좋은 전지도 얻고 좋은 벼슬을 제수 받았으니, 박여주는 참으로 복 있는 사람이다’”(『명종실록』 명종 21년, 1566년 6월 23일)는 것이다. 힘 많은 기득권층이 자기 잇속만 차리니 힘 없는 일반 백성은 자신의 살 길에만 안주하는 것은 당연하다. 옥천 사람 곽유의 상서문이다. “수령이 제언을 만들 만한 곳을 찾아 물어도 백성들이 모두 숨기고 고하지 않는 것은, 그 기름진 전지가 손실되고 끝내 그 이익이 없기 때문입니다. … 전에 백성들의 비옥한 전지를 빼앗아 조그만 제언을 쌓아 물을 저장하여도 만일 춘경(春耕)할 때를 당하여 비가 흡족하게 내리면, 제언의 물에 의뢰하지 않더라도 관개가 스스로 족하며, 후에 가뭄이 있게 되면 제언 안의 물과 제언 아래 땅이 일시에 함께 말라 버리니, 그 전지의 손실만 있을 뿐이요, 끝내 그 이익이 없는 까닭에 백성들이 모두 즐거워하지 않습니다.”(『세조실록』 세조 3년, 1457년 9월 24일) 지배계급의 부패와 그에 따른 중간계급의 이익집단화와 복지부동이라는 관료제의 병폐 때문에 사회 시스템은 비효율적이 되고 결국에는 다른 세력에 의해 새로운 사회가 들어선다. 사회변혁의 힘이 내부에서 비롯되는 가의 여부에 따라 새로운 사회의 성격이 달라지는데, 그것이 백성들의 구체적인 삶에는 매우 중요하다. 조선의 수리정책이 제대로 수행되지 못한 또 다른 이유로는 기술상의 한계를 들 수 있다. 제언이 제 기능을 다할 수 있기 위해서는 물을 잘 가둘 수 있고 또한 필요할 때 잘 흘러갈 수 있어야 하기에 수문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풍석은 무엇을 강조하는가. “양쪽에 벽돌로 벽을 쌓고 양쪽 벽에 홈을 내 판목을 가로로 꽂는데, 층층이 높게 쌓아서 차례로 여닫을 수 있게 한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 방법을 모른다. 이른바 물을 뺀다는 것이 기껏해야 나무를 쪼개서 통을 만들고 둑 중간에 꽂는 것인데, 높낮이가 정해져 있어서 옮기거나 바꿀 수가 없다.”(『본리지』 1-275)고 한다. 그런 방식의 수문을 만드는 것이 그리 어려운 것이었던가. 설비뿐만 아니라 최신의 수차 도입을 강조한다. 풍석의 부친 서호수(徐浩修)는 이조판서로 있을 때 상소를 한다. “우리나라의 농민들이 평소에 저수(貯水)하고 하수(下水)하는 방법에 어둡기에 10여 고을이 몇 순(旬) 동안에 가뭄을 방비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 대저 농사 일이 허술하게 된 것은 농구(農具)가 갖추어 지지 않았기 때문이니, 마땅히 이번에 한번 강구해서 설치하여 이 뒤에도 두고 쓰는 자료가 되게 해야 합니다”하여 정조가 서호수에게 명하여 용미거(龍尾車) 만드는 일을 감독하도록 하여 제작은 이루어졌으나 반포하는 일은 실현하지 못했다.(『정조실록』 정조 7년, 1783년 7월 4일) 용미거는 서광계의 『농정전서』에 나오는 수차로, 당시에는 시계를 제외하고 가장 정교한 기계장치이다. 이를 제작하기 위해서는 철을 제련하는 고도의 기술이 요구되었다. 다산 정약용도 용미거 같은 첨단기계를 보급하지 못하는 것에 안타까워했는데, “근세에도 견문이 넓은 선비가 또한 여러 번 시험하여 성공하지 못하였으니 반드시 온갖 공인(工人)의 기예(技藝)가 정밀하고 숙련되어 교묘한 경지”(『목민심서』 공전 6조/제2조 천택)를 요구한다고 적고 있다. 당시 조선의 기술적 한계이다. 하여간 풍석은 생산력의 발전을 위하여 다양한 농업 관련 설비 및 기구 도입을 강조하였다. 『본리지』에서 4권에 걸쳐 《그림으로 보는 농사 연장-상(권제10), 하(권제11)》, 《그림으로 보는 관개시설-상(권제12), 하(권제13)》 등을 싣고 있다. 풍석의 열망이 잘 드러난다. 하지만 그러한 열망의 실현은 새로운 사회 시스템과 첨단기술의 뒷받침이 되어야 했다.   김성철 전 한국농어촌사회연구소 소장, 전 전국도시농업시민협의회 정책위원장 '고농서연구모임'에서 함께 배우고 있습니다.

2019년 10월 19일 | 김성철

흙이 먹는 밥, 퇴비는 무엇인가 소멸과 생성을 반복하는 자연생태계에서 유기물은 생육이 끝나면 사라지는것 같지만, 또 다른 생명체의 지속성을 위해 흙으로 순환된다. 인류는 농사를 시작한 이후로 유기물을 생태순환의 연결고리로 퇴비를 만들어 농사에 사용하고 있다. 퇴비는 화학비료와 농약을 사용하는 관행농업에서도 사용한다. 양분이 고농축된 화학비료를 쓰는데 퇴비를 왜 사용할까? 퇴비를 쓰지 않고 화학비료만으로 농사를 짓는다면 흙은 양분을 저장하는 보비력이 약해진다. 또한, 땅심을 유지하는 유기물과 미생물의 감소로 흙은 황폐화 되고 지속가능한 농사를 할 수 없다. 흙이 먹는 밥 퇴비는 작물에 영양을 공급하여 성장을 촉진하는 비료의 기능보다는, 흙의 힘을 키우는 지력을 높이는데 사용목적이 있다. 작물의 건강한 성장을 돕는 흙은 유기물이 풍부한 퇴비에서 힘을 얻는다. 즉, 퇴비는 흙을 만드는 미생물의 밥이다.   퇴비는 탄소와 질소로 구성된 유기물의 화학작용으로 만들어진다. 퇴비의 재료가 되는 유기물은 미생물에 의해 분해되어 작물의 양분이 되고, 부식(humus)의 형태로 흙속에 축적된다. 부식은 짙은 암갈색으로 미생물의 증식과 물과 양분을 유지하는 힘을 높여준다.   탄소가 많은 유기물은 수분이 적고 세포를 구성하는 리그닌(lignin)을 분해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린다. 반면, 질소가 많은 유기물은 수분이 많고 세포를 구성하는 섬유소(cellulose)를 분해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짧다. 부식은 탄소가 많은 유기물에서 축적되며, 퇴비과정을 거치지 않고도, 동식물체의 유기물이 흙속에 들어가면 미생물에 의해서 분해되어 축적된다. 퇴비를 만드는 이유 그러나, 농사에서는 분해되지 않은 유기물을 흙속에 투입할 경우 미생물의 분해과정에서 가스중독에 의한 작물의 피해가 생길 수 있다. 또한, 미생물은 탄소가 많은 재료를 분해하려고 흙속의 질소를 사용하여 작물생육이 불량할 수 있는 질소기아 현상이 생길수도 있다. 이러한 문제를 예방하기 위해서 농사는 탄소화합물을 분해하는 퇴비화 과정을 거친 완숙발효퇴비를 사용하는것이다. 퇴비화 과정을 거치지 않았다면 유기물은 흙위에 덮어주는 멀칭을 한다. 흙속의 퇴비는 양분으로 순환되고 유기물 멀칭은 수분유지와 미생물증식으로 흙의 지력을 높이고 작물생육을 돕는다. 퇴비의 재료가 되는 탄소가 많은 유기물은 나무에서 파생된 톱밥이라고 할 수 있으며, 낙엽이나 고추와 콩처럼 줄기가 목질화된 작물의 잔사도 탄소가 많다. 질소가 많은 유기물은 녹색의 풀과 채소류에 많으며, 인분과 축분의 배설물에도 질소가 많다. 과거의 농경사회부터 탄소와 질소를 구성하는 재료를 이용하여 퇴비를 만들었다. 논작물의 부산물로 나온 볏짚이나 왕겨에 밭작물의 잔사와 풀을 쌓고 인분이나 축분을 섞었다. 인간의 생활에서 필요하지 않았던 부산물은 흙으로 되돌리는 퇴비의 순환은 농사에서 중요하다.    

2019년 10월 19일 | 오창균

현재 인간이 섭취하는 주곡을 꼽으면 밀, 보리, 벼, 옥수수 등으로서, 이는 모두 한해살이 식물에 해당됩니다. 즉, 사계절이란 1년 안에 1번만 농사가 이루어진 뒤 이듬해에는 다시 씨앗을 파종하거나 모내기를 해야 하지요. 그런데 최근 농사로 인한 기후변화의 책임이나 환경 파괴 등의 문제에 주목하며 여러해살이 곡식을 개발하고 있는 사람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서구에서는 토지 연구소(Land Institute)라는 곳이 유명합니다. 이 연구소에서는 개밀(Thinopyrum intermedium)로 알려진 벼과 식물을 이용해 컨자Kernza라고 하는 여러해살이 곡식을 육종해 보급하고 있습니다. 이 여러해살이 곡식 작물을 재배함으로써 토양에 덮개를 제공해 토양침식을 크게 줄이고, 자연생태계와 유사한 농업생태계를 조성할 수 있다고 합니다. 또한 이 여러해살이 작물의 뿌리가 계속 토양에서 성장하며 여러 이로운 토양미생물을 번성하게 합니다. 즉, 그를 통해 해마다 되풀이되는 경운 작업을 피할 수 있지요. 마지막으로 이 모든 일을 통해 대기 중의 많은 탄소를 땅속으로 격리시켜 기후변화를 완화하는 데에도 이바지할 수 있습니다. <그림1 일반적인 한해살이 밀과 여러해살이 밀인 컨자의 뿌리 차이. 컨자의 뿌리는 그림처럼 땅속으로 깊고 풍성한 뻗어 여러 생태학적 이로움과 함께 기후변화 완화의 효과를 제공한다.> 또 다른 사례는 가까운 일본에서 시도되고 있습니다. 카나가와현에 살고 있는 농민 오가와 마코토小川誠 씨가 그 주인공입니다. 이 분은 우리에게 익숙한 곡식인 벼를 여러해살이로 재배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상상이 되나요, 벼가 여러해살이라니요? 벼는 해마다 새로 모내기를 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오가와 씨가 여러해살이 벼를 농사짓게 된 건 이러했다고 합니다. 일본도 한국처럼 저출산 고령화의 직격타를 맞아 농촌에는 장기간 방치된 농경지가 늘어나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본인은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의 약 20년 정도 장기간 방치된 휴경지를 2007년부터 빌려 벼농사를 짓게 되었답니다. <세상을 바꾸는 기적의 논>(살림, 2012)의 저자인 故 이와사와 노부오 씨의 벼농사처럼 ‘무경운’과 ‘겨울철 담수’를 실천하는 벼농사를 짓던 와중에, 지난해 베어낸 벼의 밑동에서 봄이 되면 새싹이 나와 자라는 데에 주목하게 됩니다. 그래서 6년 전인 2013년부터는 본격적으로 여러해살이 벼농사에 전념하고 있습니다. <그림2 여러해살이 벼농사를 시도하고 있는 일본의 오가와 마코토 씨.> <그림3 겨울철 담수를 실천하는 오가와 씨의 논에서는 사진처럼 붓뚜껑말(Oedogonium) 같은 조류가 번성한다.> 겨울에도 논에 물을 대어 놓아 여러 미생물과 수생동식물이 번성하며 월동하고, 무경운을 실천하기에 벼의 뿌리가 계속 살아 있으면서 그 세력을 확장해 벼가 지닌 본래의 힘이 발휘된다 합니다. 벼를 베어낸 지상부는 누렇게 시들어도 땅속의 줄기와 뿌리는 살아남아 계속 성장한다는 것이지요. 여기에서 3-4월이 되면 새로운 싹이 돋아 새로 모내기를 하지 않아도 여러해살이 식물처럼 계속해서 이삭을 맺게 됩니다. <그림4 월동한 벼의 밑동에서 봄이 되어 올라온 새싹의 모습.> <그림5 본격적으로 새끼치기에 들어간 여러해살이 벼의 모습.> 밑동에서 자란 새싹이 무슨 힘이 있겠는가 싶지만, 벼가 지닌 새끼치기 능력이 십분 발휘되며 새로 모내기한 것보다 오히려 더 일찍 세력이 좋게 자란다고 합니다. 하나의 밑동에서 보통 3배 이상의 줄기가 새끼치기를 하게 되어, 수확량도 자연스럽게 늘어난다고 합니다. 모내기한 벼와의 차이점이라면, 여러해살이 벼는 그보다 빠른 7월부터 이삭이 패기 시작해 차례대로 계속해서 이삭이 팬다는 점입니다. 그러니까 수확 작업이 마지막에 한번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8월부터 10월까지 몇 번에 걸쳐 행해져야 합니다. 오가와 씨 본인은 이삭만 따는 작업을 2번 한 뒤, 10월 말쯤 완전히 벼를 베는 작업을 합니다. 여기서 잠깐, 벼의 이삭만 따는 수확은 고대부터 행해진 전통적인 농법이긴 합니다. 다들 잘 알고 있는 반달돌칼이 그 작업에 특화된 도구이지요. 동남아시아 일대의 소수민족들은 아직도 그러한 방식으로 벼를 수확하고 있습니다. (반달돌칼로 이삭을 따는 수확 작업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고 http://blog.daum.net/plascamp/655?fbclid=IwAR1aLFSIUpE4yYTs7egF5Je9wU6JS_uSx4CJAedBRVC3u_0YegCQ8IAbKec) <그림6 모내기와 여러해살이 벼의 6월의 모습.> <그림7 여러해살이 벼는 사진처럼 순차적으로 이삭이 팬다. 그래서 기계화는 어렵지만, 다른 많은 장점을 가지고 있다.> 그의 말에 의하면, 무경운과 겨울철 담수 이외에도 안정된 수온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 같습니다. 여러해살이 벼농사를 시도하는 그의 논은 수온이 1년 내내 거의 15도 정도로 유지된다고 합니다. 겨울에는 상대적으로 따뜻한 물속에서 벼의 땅속줄기가 성장하는 건 물론이고 여러 수생동식물이 번성하게 됩니다. 그리고 여름에는 상대적으로 매우 찬 온도(일반적인 논에서는 여름철 수온이 20-25도까지 상승)이기에 여러해살이 벼가 단련되는 과정을 거친다는 겁니다. 또한 그의 경험에 의하면, 논의 물 깊이도 중요합니다. 겨울에도 5cm 이상 물을 대야지 그렇지 않으면 이듬해 새싹이 나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지역의 자연환경에 잘 적응한 토종 벼 품종이 더 유리하다고 합니다. 본인은 카나가와현 사가미하라相模原에 살고 있는데, 그곳의 토종 벼인 희수찰(喜寿モチ)이란 찰벼와 사토지만(サトジマン)이란 메벼를 이용해 여러해살이 벼농사를 짓고 있답니다. 그는 여러해살이 벼농사는 될 수 있으면 인간의 손길을 주지 않는 편이 좋다고 지적합니다. 무경운은 물론, 가능하면 최대한 자연의 힘에 맡겨 쓸데없이 인간이 참견하지 않는 게 관건이라 합니다. 논에는 계속 물을 대 놓기에 풀이 자라기 어려워 김매기의 필요성도 적고, 또 벌레들이 논두렁 등지의 풀을 먹기 때문에 제초 역시 최대한 하지 않는 편이 더 낫다고 합니다. 이처럼 여러해살이 벼농사는 기계화가 어려워 농가소득으로 이어지기에는 난관이 많다는 단점은 있지만, 300평에 약 400kg 정도의 수확이 가능해 한 가족의 식량으로는 충분하다고 합니다. 즉, 소규모 가족농의 자급용 농사로 적격이라는 말이지요. 또한 기계를 쓰지 않고, 비료(오가와 씨는 볏짚만 거름으로 돌려줌)나 제초제 등의 농자재도 필요가 없이 생산비가 거의 들지 않는다는 장점도 있습니다. 물론 못자리 등을 만들고 제초를 하는 노동력도 절감이 되지요. 바로 요즘 한국에서 권장되는 직파 벼 재배의 장점을 고스란히 담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무엇보다 인간과 자연이 지속가능하게 공존할 수 있다는 점이 가장 큰 장점이 아닐까 합니다. 참고 영상. 여러해살이 벼에 대해 설명하는 오가와 마코토 씨 https://youtu.be/inp8_w8Ku8c **[농사잡록]은 김석기 선생님의 연재코너입니다. 강희맹 선생의 [금양잡록]에서 따온 이름입니다. '농사와 관련된 잡다한 기록'이란 뜻입니다.**

2019년 10월 3일 | 김석기

  고구마   나는 육남매의 대가족 속에서 자랐다. 우리 육남매의 어릴적 겨울철 별미 간식이었던 고구마는 여전히 일등 간식거리이다. 육남매의 먹을거리로 엄마가 종종 져주셨던 찐 고구마 그리고 겨울이 오면 퇴근하시는 길에 또는 외출에서 돌아오실 때면 아빠, 엄마가 잊지 않고 사오셨던 달달한 군고구마의 맛은 소중한 추억의 맛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외출에서 빈손으로 돌아오시는 경우는 드물었다. 집에서 기다릴 우리들을 위해 그 계절에 맛볼 수 있는 무언가를 사오셨다. 부모님이 집안에 들어오시면 내 눈길은 자연스럽게 두 분의 손으로 향해 있었다. 막내인 남동생보다 더 막내 같았던 막내딸인 내가 가장 기다리던 시간이기도 했다. 대가족이 나누어 먹다보니 기대보다 적게 돌아오는 고구마의 양에 매번 아쉬움이 남았지만 아쉬운 마음의 크기만큼 더 맛있게 달게 먹지 않았나 쉽다. 그리고 무엇보다 온 가족이 서로를 챙기며 나누어 먹었던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그 시간이 더없이 소중하다. 고구마에 담긴 우리의 소소했던 일상을 떠올릴 수 있어 감사하다. 고구마를 먹을 때면 꼭 등장했던 부모님이 직접 담그셨던 김장김치, 뜨거운 김이 솔솔 올라오는 고구마 위에 잘 익은 시원한 김치를 올려 한 입 베어 물면 세상 어떤 간식보다도 맛있었다. 때로는 마당의 한켠에 묻어 둔 장독에서 꺼내온 얼음 동동 올려진 동치미와 먹기도 했다. 집에서 손수 키워낸 고구마 순을 텃밭에 옮겨 심어 키웠던 나의 첫 고구마 수확은 들쑥날쑥한 모양과 크기로 못난이였지만 속이 알찬 달달한 고구마였다. 또한 한창 자라는 시기에는 고구마 순을 계속 따서 먹을 수 있어 좋다. 현재는 자그마한 텃밭에 다양한 채소를 키우다보니 고구마에게 내어 줄 수 있는 공간이 작다. 그렇지만 언젠가는 수확한 고구마를 겨울동안 간식으로 먹을 넉넉한 양으로 다양한 고구마를 키울 날이 오길 바란다. 이번에 소개해 드릴 레시피는 군고구마가 절로 생각나는 계절, 겨울에 만들어 먹으면 고구마의 달달한 맛을 진하게 느낄 수 있는 파운드케익이다. 버터, 달걀, 우유가 들어가지 않지만 한 끼 식사로 또는 우리 아이 간식으로 맛있게 만들어 줄 수 있는 자색고구마 파운드케익이다. 자색고구마는 일반 고구마에 비해 단맛은 적지만 시력에 좋은 안토시아닌이 풍부하고 섬유질이 많아 영양은 물론 건강에 좋고 찌거나 구워도 맛있고 생으로 아삭아삭한 맛을 즐겨도 좋다. < 버터, 달걀, 우유가 들어가지 않은 자색 고구마 파운드케익 > 레시피 재료   우리밀 통밀가루 110g, 베이킹 파우더 4g, 자색 고구마 또는 일반 고구마 120g, 두유 100g, 소금 2g, 원당 40g, 식물성유 20g 만드는 방법 1.볼에 우리밀 통밀가루, 베이킹파우더, 소금, 원당을 담는다. 거품기로 가볍게 섞은 다음 고운체에 내려준다. 2.다른 볼에 두유를 넣고 식물성유를 2~3번에 나누어 넣어 섞은 다음 고구마를 넣어 골고루 섞는다. 3.2)에 1)을 넣고 주걱으로 날가루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가볍게 섞는다. 4.반죽을 틀에 붓고 주걱을 이용해서 윗면을 평평하게 정리한다. 5.175℃로 예열한 오븐에서 20~25분 굽는다.     *박선홍 님은 9년차 도시농부로 네이버 블로그에  '요리하는 도시농부'를 운영하고 있으며 텃밭 에세이 <요리하는 도시농부>를 출간하기도 했습니다.    

2019년 10월 3일 | 박선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