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농서-임원경제지6] “국가의 일에 밤낮으로 마음을 다하는 자가 적으니 진실로 탄식할 일”

지금 국가의 일에 밤낮으로 마음을 다하는 자가 적으니 진실로 탄식할 일이로다.”

농업이 근간인 조선에서 수리행정은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중앙 단위에서 초기부터 호조에서 담당하다가 성종 12년(1481년)에 전담기관인 제언사를 설치하였다. 임란 이후 국가기강이 문란해지며 유명무실해진 제언사를 현종 3년(1662년)에 다시 설치하면서 수리행정의 시행규칙 격인 「진휼청 제언사목」을 제정하였으며 정조 2년(1778년)에는 「제언절목」을 반포하였다.

「진휼청 제언사목」에 “제언사를 다시 설치하고 도제조는 삼공으로, 제조는 호조판서와 진휼청당상이 겸찰(兼察)”(『비변사등록』 22책, 현종 3년, 1662년 1월 26일)한다고 했다. 그러니까 제언사의 직급을 지금의 국무총리로 최고로 높였다.



지방 단위에서는 지방수령이 수리사업을 실제로 집행하였다. ‘수령 칠사’라 하여 지방관이 힘쓸 7 가지 일 중 하나가 ‘농상 장려’였다. 지방관의 소임을 충실히 다하도록 제언 수축을 포함해 다양한 정량 지표를 고과에 반영하였다. 태종 때 정한 수령의 인사고과 내용을 보면 당시에 무엇을 중요시했는가를 알 수 있다.

“농상(農桑)을 권과(勸課)하여 경내에 제언(堤堰)을 수축한 곳이 몇 곳이며, 도임 후 백성에게 뽕나무 심기를 권고하여 매 1호에 몇 주(株)씩 심었으며, 관(官)에서 심은 뽕나무를 나누어 주어서 심은 것은 매 1호에 몇 주씩인가? 백성에게 수차(水車)를 만들도록 권한 것은 한 마을에 몇 개씩이며, 관에서 만들어 나누어 준 것은 한 마을에 몇 개씩인가? 권경(勸耕)한 것은 몇이며, 온 집안이 병을 앓고 있는 자는 이웃[隣理]으로 하여금 경작해 주게 하고, 그가 회복되기를 기다려 값을 갚아주게 한 것이 몇인가?”(『태종실록』 태종 6년, 1406년 12월 20일)

「제언절목」은 「진휼청 제언사목」에 비해 보다 구체적으로 규칙을 정한다. 제언을 파내어 소통시킬 때 나온 진흙을 제언 안에다 모아 쌓지 말고 제방 위에 쌓으라, 제언에 수통(水桶)이 없었기 때문에 물을 대기가 불편하고 흙을 쌓아놓은 곳이 많이 터졌으니 앞으로는 반드시 수통을 설치하라, 역사에 드는 군정은 호적의 차례에 따라 부역하게 하라, 전에 쌓은 제언의 높이는 얼마인데 금년 새로 쌓은 것의 높이는 몇 척이라고 구별하여 본사에 올려 보내라 등등이다.

「제언절목」의 내용과 같이 풍석 선생의 제안도 비슷하다. “진실로 둑을 굳게 하고 수문을 견고하게 한 뒤 수문을 때에 맞추어 열고 닫으며 몰래 도랑 파는 것을 금지하여 물이 새나가지 않게 한다면, 호수는 힘들이지 않고 복구될 수 있으니, 백성들이 비록 제멋대로 경작하여 농지를 만들고자 하여도 할 수가 없을 것이다. … 호수를 준설할 때는 이치상 반드시 흙을 둑 위에 놓아야 하고, 둑을 쌓을 때는 이치상 반드시 흙을 호수에서 취해야”(『본리지』 1-274) 한다는 것이다.

제언사목이나 제언절목에서 규정으로 자세히 강조한다는 것은 시행되지 않는다는 현실을 반영한다. 조선이 막 새로 시작한 때인 태조 4년에 정분(鄭芬)은 제언 축조의 중요성을 진언하면서 물구멍 설치를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수구(水口)에는 돌로 도랑을 만들어 그 위를 쌓게 하고, 뚝과 같도록 도랑 안쪽에는 나무통을 세우고 나무통 안쪽에는 셋이나 다섯 구멍을 만들어서 물의 높고 낮은 데를 따라서 통하거나 막히게 하며, 도랑 바깥으로는 나무통을 두되 두 끝을 비워 두고, 그 밑으로는 좌우로 물을 내려서 끌어가도록 하고, 따로 제언의 한 쪽에 몇 자나 낮게 쌓되 수통의 웃구멍보다 약간 높게 돌을 깔아서 장마에 물이 뚝을 넘치는 것을 방비하소서.”(『태조실록』 태조 4년, 1395년 7월 30일)

태종 때 우희열(禹希烈)이 제언의 일로 상서한다. “‘어느 수령은 어느 해 어느 철에 옛 터에 축조를 더 한 것이 몇 군데이고, 새로운 터에 축조한 것이 몇 군데이고, 물을 저장한 것이 몇 척이고, 관개한 땅이 몇 결이라’는 것을 일일이 갖추어 써서 시행하여 감사에게 보고하고, 감사가 척간(擲奸)하여서 출척(黜陟)에 빙고하게 하소서.”(『태종실록』 태종 18년, 1418년 1월 13일) 지방관의 제언 수축 내용을 정량적으로 기록한 것을 인사고과에 반영하기를 간청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문제는 비슷하다. 정분과 우희열은 최고의 수리전문가이다. 사업의 중요성과 방식을 몰라서가 아니라 시행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정조 2년에 반포된 「제언절목」에서 제언을 논으로 바꾸어 쓰는 ‘모경(冒耕)’이라는 고질적인 병폐를 경계한다. 그로부터 20년 후 농사를 권장하고 농서를 구하는 구언 전지를 내렸던 개혁 군주 정조도 어쩔 수 없었다.

“제언(堤堰)에 관한 정사를 오랫동안 버려두어 제언에다 불법적으로 경작하는 일이 잇따르고 있다. 호남 지방의 벽골제(碧骨堤)와 호서 지방의 합덕지(合德池), 영남 지방의 공검지(恭儉池), 관북 지방의 칠리(七里), 관동 지방의 순지(蓴池), 해서 지방의 남지(南池), 관서 지방의 황지(潢池)와 같은 제언은 나라 안에서 큰 제언이라고 칭해지는데 터놓을 곳을 터놓지 않고 막을 때 막지 않아서 장마가 지나간 뒤 즉시 말라붙어 해마다 흉년이 들고 있다.”(『정조실록』 정조 22년, 1798년 11월 30일)

어떻게 이 지경까지 이르렀는가. 연산군이 출가를 앞둔 휘순 공주에게 합덕의 제언을 주고자하였는데 좌의정 성준(成俊)이 “합덕의 제언은 혜택을 입는 백성이 많으니 이를 빼앗아 줄 수는 없습니다”하고 예조 판서 이세좌(李世佐)는 “제언을 폐지하여 공주에게 주는 것은 사체에 옳지 못합니다”하니 뜻을 접었다.(『연산군일기』 연산 8년, 1502년 5월 2일)

왕부터 잘못을 하니 관료들도 협작꾼이 되었다. “승천부(昇天府)의 제언은 상주민이 물을 저장한 곳인데, 윤백원(尹百源)이 그 땅이 넓고 기름져서 전답으로 하기에 알맞다 하여 작고한 처모(妻母) 효혜 공주(孝惠公主)의 이름을 도용해서 그 토지를 떼어 받아 이양(李樑) 등과 함께 차지했고, 이언충(李彦忠)은 그때 감사로서 백성을 징발하여 메우는 일을 주관하였는데 몰래 그들과 더불어 이익을 분배하였으며, 이양은 이조 판서로 있으면서 생원 박여주(朴汝柱)가 감독한 공이 있다 하여 곧 의금부 도사를 제수하고 정청(政廳)에서 공공연히 ‘좋은 전지도 얻고 좋은 벼슬을 제수 받았으니, 박여주는 참으로 복 있는 사람이다’”(『명종실록』 명종 21년, 1566년 6월 23일)는 것이다.

힘 많은 기득권층이 자기 잇속만 차리니 힘 없는 일반 백성은 자신의 살 길에만 안주하는 것은 당연하다. 옥천 사람 곽유의 상서문이다. “수령이 제언을 만들 만한 곳을 찾아 물어도 백성들이 모두 숨기고 고하지 않는 것은, 그 기름진 전지가 손실되고 끝내 그 이익이 없기 때문입니다. … 전에 백성들의 비옥한 전지를 빼앗아 조그만 제언을 쌓아 물을 저장하여도 만일 춘경(春耕)할 때를 당하여 비가 흡족하게 내리면, 제언의 물에 의뢰하지 않더라도 관개가 스스로 족하며, 후에 가뭄이 있게 되면 제언 안의 물과 제언 아래 땅이 일시에 함께 말라 버리니, 그 전지의 손실만 있을 뿐이요, 끝내 그 이익이 없는 까닭에 백성들이 모두 즐거워하지 않습니다.”(『세조실록』 세조 3년, 1457년 9월 24일)

지배계급의 부패와 그에 따른 중간계급의 이익집단화와 복지부동이라는 관료제의 병폐 때문에 사회 시스템은 비효율적이 되고 결국에는 다른 세력에 의해 새로운 사회가 들어선다. 사회변혁의 힘이 내부에서 비롯되는 가의 여부에 따라 새로운 사회의 성격이 달라지는데, 그것이 백성들의 구체적인 삶에는 매우 중요하다.

조선의 수리정책이 제대로 수행되지 못한 또 다른 이유로는 기술상의 한계를 들 수 있다. 제언이 제 기능을 다할 수 있기 위해서는 물을 잘 가둘 수 있고 또한 필요할 때 잘 흘러갈 수 있어야 하기에 수문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풍석은 무엇을 강조하는가. “양쪽에 벽돌로 벽을 쌓고 양쪽 벽에 홈을 내 판목을 가로로 꽂는데, 층층이 높게 쌓아서 차례로 여닫을 수 있게 한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 방법을 모른다. 이른바 물을 뺀다는 것이 기껏해야 나무를 쪼개서 통을 만들고 둑 중간에 꽂는 것인데, 높낮이가 정해져 있어서 옮기거나 바꿀 수가 없다.”(『본리지』 1-275)고 한다. 그런 방식의 수문을 만드는 것이 그리 어려운 것이었던가.

설비뿐만 아니라 최신의 수차 도입을 강조한다. 풍석의 부친 서호수(徐浩修)는 이조판서로 있을 때 상소를 한다. “우리나라의 농민들이 평소에 저수(貯水)하고 하수(下水)하는 방법에 어둡기에 10여 고을이 몇 순(旬) 동안에 가뭄을 방비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 대저 농사 일이 허술하게 된 것은 농구(農具)가 갖추어 지지 않았기 때문이니, 마땅히 이번에 한번 강구해서 설치하여 이 뒤에도 두고 쓰는 자료가 되게 해야 합니다”하여 정조가 서호수에게 명하여 용미거(龍尾車) 만드는 일을 감독하도록 하여 제작은 이루어졌으나 반포하는 일은 실현하지 못했다.(『정조실록』 정조 7년, 1783년 7월 4일)

용미거는 서광계의 『농정전서』에 나오는 수차로, 당시에는 시계를 제외하고 가장 정교한 기계장치이다. 이를 제작하기 위해서는 철을 제련하는 고도의 기술이 요구되었다. 다산 정약용도 용미거 같은 첨단기계를 보급하지 못하는 것에 안타까워했는데, “근세에도 견문이 넓은 선비가 또한 여러 번 시험하여 성공하지 못하였으니 반드시 온갖 공인(工人)의 기예(技藝)가 정밀하고 숙련되어 교묘한 경지”(『목민심서』 공전 6조/제2조 천택)를 요구한다고 적고 있다. 당시 조선의 기술적 한계이다.

하여간 풍석은 생산력의 발전을 위하여 다양한 농업 관련 설비 및 기구 도입을 강조하였다. 『본리지』에서 4권에 걸쳐 《그림으로 보는 농사 연장-상(권제10), 하(권제11)》, 《그림으로 보는 관개시설-상(권제12), 하(권제13)》 등을 싣고 있다. 풍석의 열망이 잘 드러난다. 하지만 그러한 열망의 실현은 새로운 사회 시스템과 첨단기술의 뒷받침이 되어야 했다.

 

김성철
전 한국농어촌사회연구소 소장, 전 전국도시농업시민협의회 정책위원장
'고농서연구모임'에서 함께 배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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